나머지 3명은 불구속 송치할 계획이다.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이 됐을까.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속죄하는 조형물이 강원도 평창의 한 식물원에서 다음달 10일 공개된다.
방송 후 화제가 됐다
주최 측은 "시민 안전이 우려된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탐사보도센터도 동영상 작품의 철거를 요구했다
제막식 이틀 만에 철거된 동상이 시장의 집에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소녀상을 볼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소녀상은 일종의 토템이다. 그것은 우리가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팔아버린 소녀들이며, 그 소녀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세운 우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우상에 대한 어떠한 의심이나 문제 제기도 터부시된다.
아방가르드는 현실과 예술의 분리라는 질서를 뒤흔들고자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러한 기획은 미술관이라는 금 그어진 공간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미술관 바깥을 나가면 그것은 폭동 아니면 혁명이 된다. 최소한 교통위반이라도 걸리게 된다. 반대로 아방가르드가 미술관에 갇히면 그것은 얌전하게 길들여진 짐승이 된다. 그것은 전복의 이빨이 빠진 채 던져주는 먹이를 삼키며 살아가는 동물원 동물 신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제아무리 강력한 언어를 내보이더라도 미술관 미술에서 좀처럼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동물원 동물에게서 야성의 매력을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나는 한국인의 기본적인 도덕성이 바로 이러한 '약한 악'의 차원에 있다고 보는데, 정말 놀라운 점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약함'을 '선함'과 일치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몽골,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강한 악'으로 설정하고, 자신들을 '약한 선'으로 치환한 것이야말로 한국인들의 가장 창조적인 업적이라고까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인이 '약한 종족'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선한 종족'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역사는 '약함'이 빈번하게 '악함'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야말로 근대 한국인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자기 기만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위안부 소녀상은 과거에 관한 작품이고, 겁없는 소녀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조각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조각은 상이한 역사를 가진 두 사회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아픈 역사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희생자로 객체화된 여자아이의 모습 때문이다.